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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원

슬랙스 역사

슬랙스 역사 — '헐렁한 바지'가 어떻게 형식의 상징이 되었나

1940년대 후반, 미군 군복을 민간용으로 푼 물건들이 서울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에 쏟아지던 때다. 당시 한국인 눈에 들어온 건 군용 면바지 특유의 넉넉한 통과 편안한 허리 — 영어로 'slacks'라 불리던 그 바지였다. '헐렁하다'는 뜻의 이 단어는 미군 PX에서 흘러나와 양복점을 거치며 의미가 기묘하게 뒤집혔다. 지금 한국에서 슬랙스는 정장 하의부터 오피스 캐주얼용 테일러드 팬츠까지 아우르는 드레시한 바지의 대명사다. 데님이나 트레이닝처럼 소재로 정의되지 않고, 오직 형식성 하나로 묶이는 범주라는 점이 이 바지의 정체성을 만든다.

영어권에서 'slacks'가 지금도 '헐렁한 캐주얼 바지'의 뉘앙스를 간직한 반면, 한국의 슬랙스는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 뒤집힌 역사를 이해하면 슬랙스를 고를 때 막연한 유행이 아니라 용도와 핏의 논리로 판단할 수 있다.

미군 보급품에서 양복점 진열대로

슬랙스의 영어 어원은 고대 영어 'sleac'(느슨한, 헐거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군과 영국군은 병사들에게 규격화된 유니폼 팬츠를 지급하면서도, 막사 안이나 비번 시간에 입을 여유 있는 바지를 따로 보급했다. 이게 'slacks'의 시작이다. 군용 유니폼이 딱 맞는 핏과 내구성 위주였다면, 슬랙스는 활동성과 편안함을 우선한 보조 바지였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 원조 물자로 들어온 이 바지는 동대문 평화시장과 남대문 일대에서 민간 유통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바지는 한복 바지나 작업복 수준의 통 넓은 고쟁이뿐이었다. 미군 슬랙스는 서양식 절개와 주머니, 앞지퍼 구조를 갖춘 '신식 바지'였고, 여기에 익숙해진 양복점들이 이 디자인을 정장 하의 제작의 기본 틀로 삼았다. 군용으로 시작한 헐렁한 바지가 한국 양복 문화의 격식 템플릿이 된 건 이 시기다.

크리즈 한 줄이 만든 형식의 언어

슬랙스가 데님이나 치노와 한눈에 구분되는 지점은 앞판 중심을 따라 세로로 눌러 잡은 주름선, 즉 크리즈다. 이 한 줄이 다리를 곧고 길게 보이게 하는 동시에, '관리된 옷'이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크리즈는 20세기 초 영국 사빌로의 수트 장인들이 바지의 드레이프를 극대화하기 위해 도입한 마감 기법이었고, 이것이 양복 문화를 통해 한국 슬랙스의 기본값으로 정착했다.

슬랙스에서 보듯, 격식 있는 슬랙스에는 크리즈가 거의 반드시 있다. 다림질로 매일 살리거나 드라이클리닝으로 되살리는 번거로움이 따르지만, 이 수고를 감수하는 순간부터 그 바지는 더 이상 그냥 바지가 아니다. 크리즈가 죽은 슬랙스는 아무리 비싼 소재라도 피곤한 인상을 주니, 하나를 사더라도 관리 루틴을 정해놓는 쪽이 오래 입는 길이다.

현대 한국 슬랙스의 두 갈래

오늘날 슬랙스의 계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양복점 전통을 그대로 이은 테일러드 슬랙스로, 허리 앞쪽에 주름(플리츠)을 잡아 허벅지 여유를 확보하고 밑단은 복사뼈를 살짝 덮는 풀 기장으로 떨어뜨린다. 1980~90년대 한국 직장인의 제복이었고, 2010년대 이후 빈티지 감각으로 부활해 지금은 클래식·테일러드의 핵심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하나는 2000년대 이후 국내 SPA 브랜드와 온라인 셀렉트숍이 주도한 '이지 슬랙스'다. 허리를 고무줄 밴딩으로 처리하고 폴리 혼방·스트레치 소재로 제작해, 정장 하의의 외형에 트레이닝 팬츠의 편안함을 얹었다. 플리츠 없이 매끈한 플랫 프론트에 발목 위로 끊는 앵클 기장이 기본값이며, 화이트 스니커즈와 묶어 출근부터 주말까지 커버하는 데일리 캐주얼의 만능 하의가 됐다.

이 두 갈래 사이에서 선택은 결국 허리 처리와 기장에서 갈린다. 밴딩 슬랙스는 편하지만, 재킷 안에 넣어 입는 셔츠를 받쳐야 하는 자리에서는 허리 라인이 무너지기 쉽다. 그런 자리라면 차라리 플리츠가 있는 클래식 슬랙스나 최소한 플랫 프론트에 후크·지퍼 여밈을 갖춘 것을 고르는 게 안전하다.

출처

자주 묻는 질문

슬랙스 뜻이 원래 뭐였나요?

영어 'slacks'는 19세기 말 '헐렁하고 캐주얼한 바지'를 뜻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군복의 규격화된 바지와 달리 여유 있는 실루엣이라 붙은 이름인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정장 바지 등 격식 있는 바지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슬랙스와 정장 바지의 차이는 뭔가요?

한국에서는 거의 같은 말로 통하지만, 엄밀히 말해 슬랙스는 수트 하의를 포함해도 되고 따로 입어도 되는 '드레시한 바지 전반'을 가리킵니다. 재킷과 같은 소재·컬러로 맞춘 하의는 수트 팬츠, 그것만 떼어 다른 상의와 입을 때는 슬랙스로 부르는 게 실제 옷장 감각에 가깝습니다.

크리즈는 꼭 있어야 하나요?

격식을 갖춘 슬랙스라면 거의 반드시 있습니다. 앞판 중심의 세로 주름선이 다리를 곧고 길게 보이게 하고, 캐주얼 팬츠와 한눈에 구분되는 요소입니다. 오피스나 비즈니스 자리라면 크리즈가 살아 있는 것을 고르고, 다림질이나 드라이클리닝으로 유지하는 쪽이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