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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코디 고민

첫출근룩 고민에 밤잠 설쳤네요, 어르신들의 잔소리가 그리워질 줄이야

빈티지록셔리·2시간 전·조회 32

평생을 청바지에 낡은 가죽 자켓 걸치고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정장을 입으려니 옷장 앞에서 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습니다. 아니 땀 흘리는 게 어디 옷 때문이겠습니까만은, 내일이 첫출근인데 지금 이 시간까지 고민하다니 스스로가 좀 한심하기도 하고요.

사실 회사 복장 규정이 그렇게 엄격한 편은 아닙니다. 면접 때 슬쩍 둘러보니 다들 스마트 캐주얼 정도로 입고 계시더라고요. 슬랙스에 스웨터, 어떤 분은 깔끔한 셔츠에 면바지, 또 어떤 분은 린넨 블레이저에 치노팬츠. 이게 더 문제라는 걸 깨달았어요. 정장 풀셋업이면 그냥 네이비 수트 꺼내 입고 끝날 일인데, 자유도가 높아지니 오히려 뭘 입어야 내 사람됨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지 겁나더라고요.

  • 첫인상이라는 게 참 무섭죠. '아 저 사람 일 잘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너무 튀면 안 되고, 그렇다고 완전히 평범에 묻혀서 존재감 없어져도 곤란하고.

제가 원래 빈티지를 좀 좋아해서 옷장 구석에 처박아둔 것들 중에 건질 만한 게 없나 뒤적였습니다. 어차피 새 옷 사러 백화점 갈 시간도 없었고, 설사 간다 해도 요즘 기성복은 죄다 폴리에스터 범벅에 뭔가 가볍고 펄럭이는 느낌이라 도저히 마음에 안 차더라고요. 이럴 때 진짜 오래된 소재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싶었죠.

제일 먼저 꺼낸 건 작년 겨울에 일본 고후에서 건져온 80년대 후반쯤으로 추정되는 스코틀랜드제 캐시미어 브이넥 니트입니다. 브랜드는 유명한 곳은 아니고, 아마 당시 영국 백화점 사가 프레드릭 니콜슨 같은 데서 OEM으로 납품하던 가내 수공업 공방 제품 같아요. 라벨이 거의 다 닳아 없어졌는데, 그 올드머니 특유의 꼬불꼬불한 세리프 서체가 남아있는 걸 보면 그 시절 애버크롬비 앤 피치보다 훨씬 위 라인이었겠죠. 색은 페이디드 네이비라고 해야 하나, 오랜 세월 빛바랜 듯한 깊고 차분한 남색입니다. 군데군데 멜란지처럼 올이 풀린 데가 있지만 그게 또 40년 묵은 시간의 결이라 치유할 수 없는 매력이더라고요. 이걸 한 번 걸쳐봤는데, 역시 캐시미어는 사기 소재예요. 신축성 좋은 메리노 울에 비해 복원력은 떨어지지만, 그 대신 어깨와 가슴 라인을 따라 낙엽처럼 살포시 얹히는 드레이프가 기성 니트와는 차원이 달랐어요. 너무 헐렁하지도, 그렇다고 몸에 착 달라붙지도 않고, 마치 누군가 내 체형을 기억하고 짜준 것 같은 그 느낌.

  • 여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욕심이 과했나 봅니다. 그 밑에 받쳐입을 셔츠를 찾다가 10년 전쯤 런던 브릭레인 마켓에서 충동구매했던 90년대 조르지오 아르마니 르 꼴레지오니 흰 셔츠를 꺼내 들었어요.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르 꼴레지오니는 엠포리오 아르마니보다 한 급수 아래 확산 라인이에요. 근데 그 시절 이 라인도 지금의 브랜드 폰타나폴리나 끼톤 부럽지 않을 정도로 봉제가 깡패였습니다. 칼라는 투 버튼으로 쫙 빠지는 와이드 스프레드인데, 오랜 세월 풀을 먹이고 다려왔더니 면 사이사이에 옅은 황기가 돌면서 어떤 사이에는 흉내 낼 수 없는 엔틱한 광택이 흘러요. 면 100%에 모달이나 텐셀 그런 거 하나도 안 섞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피부 같은 감촉.

자,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문제는 바지였어요. 도대체 하의를 뭘 입어야 하나.

여름용 슬랙스 몇 벌 입어봤는데 죄다 이 캐시미어 니트의 텐션을 못 따라와요. 너무 얇으면 상체만 겨울이고 하체는 여름이라 밸런스가 깨지고, 그렇다고 도톰한 겨울용 모직 슬랙스를 입자니 사무실 안에서는 분명 다리가 쪄 죽을 것 같고. 고민 끝에 집어든 게, 이번엔 정말 희한한 아이템인데, 1970년대 미군 울 트라우저를 빈티지 샵에서 재단 수선해 슬랙스 핏으로 바꾼 물건입니다. 원래는 완전 일자에 엄청 널널한 밀리터리 핏인데, 그걸 아마 어떤 장인이 통을 싹 줄이고 밑단을 살짝 테이퍼드 쳐서 요즘 감성에도 위화감 없게 만들어놨어요. 소재는 버진울 100%인데, 색이 참 절묘합니다. 짙은 차콜 그레이인데 빛을 받으면 옅은 브라운 빛이 감도는, 뭐랄까 시간이 소재에 자연스럽게 염색한 듯한 색감. 미군 군복 특유의 뻣뻣한 질감이 아직 살아있어서 앉았다 일어서면 무릎 부분만 살짝 형태가 변하면서 제 몸에 맞춰 길들여지는 중입니다.

여기에 벨트는, 이건 좀 사치인데, 80년대 에르메스 아니고 양복점에서 주문제작한 빈티지 브라이들 레더 벨트를 골랐어요. 버클에 새겨진 로고도 뭐도 없지만, 안장 가죽 특유의 왁스 함침 냄새가 아직도 진동을 합니다. 30년 넘게 쓴 거라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버클도 살짝 휘었지만, 이 정도면 평생 함께해도 될 동반자 같은 느낌이랄까요.

슈즈는 아직 못 정했습니다. 오래 신은 것 중에 크록킹이 자연스럽게 빠진 90년대 초반의 처치스 옥스포드가 있는데, 이건 좀 너무 정장에 가깝고. 그 옆에 있는 2000년대 초반 포스트맨 슈즈 스타일의 파라부트 미하엘은 캐주얼에 가깝고. 그 사이 어디쯤에서 타협해야 하는데, 아마 내일 아침 거울 앞에서 한참을 더 서있을 것 같네요.

사실 이런 옷들을 입는다고 해서 누가 알아줄 거라는 기대는 없습니다. 그냥 제가 좋아서 모으고 입는 거고, 이런 옷들은 그래도 사람한테 묘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힘이 있다고 믿어요. 오래된 소재가 품은 연륜이 제 어설픈 긴장감을 좀 덜어주지 않을까, 하는 미련 같은 거죠. 우리 아버지 세대는 첫출근 전날 밤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주고 구두 닦는 법을 알려줬다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고. 결국 옷장 안의 헌 옷들한테 이런 위로를 받고 있는 게 우습기도 하고요.

길게 썼네요. 여러분은 첫출근룩 어떻게 입으셨나요. 아니 그보다 이런 고민을 제가 너무 과하게 하고 있는 건지, 그게 제일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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