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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하울 · 득템

세월을 품은 빈티지 롤렉스 데이트저스트, 결국 영입했습니다.

빈티지록셔리·2시간 전·조회 13

안녕하세요, 빈티지록셔리입니다. 오랜만에 하울·득템 게시판에 글 올리네요. 사실 한 달 넘게 정말 많은 고민을 했는데, 결국 마음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던 녀석을 품에 안았습니다. 1987년산 롤렉스 데이트저스트 16013, 샴페인 다이얼이에요.

사실 실물을 처음 본 순간부터 심장이 좀 철렁 내려앉았어요. 사진으로 볼 때도 예상했지만, 37년이라는 시간이 케이스와 브레이슬릿 여기저기에 고운 흠집으로 남아 있더군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습니다. 요즘 백화점에서 보는 지나치게 완벽하게 광택 복원된 올드 워치들은 원형을 해치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 녀석은 러그 라인이 아직 제법 살아 있고, 베젤의 플루티드 컷팅도 과하게 갈리지 않아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가장 고민했던 건 다이얼 상태였어요. 8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일부 트리튬 도트에 아주 미세한 변색이나 균열이 있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 녀석은 아직까지 바닐라색으로 아주 고르게 노화가 진행됐더군요. 빈티지 매니아들 사이에서 '크리미 패티나'라고 부르는 그 상태입니다. 실내 조명 아래서는 아이보리에 가깝다가, 햇볕 아래로 나가면 따뜻한 버터 옐로우 톤이 은은하게 올라오는 게... 사진으로 도저히 못 담는 그 풍경입니다. 저 멀리 80년대 뉴욕 브라운스톤 거실에 쏟아지던 노을 빛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어요.

골드 톤 쥬빌리 브레이슬릿의 처짐은 의외로 양호했습니다. 20년식 넘는 쥬빌리는 거의 팔찌처럼 주르륵 풀려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녀석은 이전 오너께서 꽤나 정성껏 착용하셨는지 살짝 탄력이 남아 있더군요. 다만 폴리싱 없이 오리지널 컨디션을 유지해서 결착부에 위스키 색상의 세월 때가 자연스럽게 껴 있는 부분이 거슬리실 분도 있겠지만, 저는 이런 빈티지 특유의 헤리티지가 너무 매력적이었습니다. 오히려 섣부른 초음파 세척으로 저 세월의 결이 날아갈까 봐 마른 극세사 천으로 아주 살살 닦아줬네요.

무브먼트는 영입 전에 오버홀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3035 칼리버, 작년에 로컬 장인분께서 분해 소제 및 타임그래퍼 조정까지 마친 녀석이라 일오차 +3초 정도로 아주 건강한 심장을 가지고 있더군요. 빈티지 롤렉스는 시계 자체의 미학도 미학이지만, 이 안에 들어간 엔지니어링이 한창 정점을 찍던 시기의 무브먼트라는 점도 큰 매력이거든요. 로터가 맥을 치며 감길 때 느껴지는, 마치 잘 정비된 구형 차저의 터빈 소리 같은 작은 진동... 이건 현행 3235 무브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촉감입니다.

착장해 본 느낌도 참 절묘합니다. 요즘 시계들이 전반적으로 다이얼이 커지고 두꺼워지는 추세라 36미리 사이즈가 작게 느껴질 법도 한데, 손목 위에 얹으면 80년대 특유의 얇은 케이스 두께와 맞물려서 정말 '감긴다'라는 표현이 딱이에요. 캐시미어 니트나 실크 블렌딩 셔츠 소맷단 아래로 아무렇지 않게 스윽 들어가는 그 맛이란. 요즘 흔히 말하는 올드머니 스타일의 완성은 결국 과하지 않은 시계에서 오는 법인데, 이 녀석은 그걸 30년 넘게 알고 있었다는 듯한 자연스러움을 선사하네요.

  • 손목 위 무게감: 현행 데이트저스트보다 훨씬 가볍습니다. 하루 종일 착용해도 부담 없는, 마치 오래된 가죽 장갑처럼 손목에 녹아드는 감각.
  • 플루티드 베젤의 빛 번짐: 요즘 베젤은 정교하게 깎여서 날카로운 광택을 뿌리지만, 이 녀석은 세월에 살짝 눅은 덕분에 빛을 직선 반사하지 않고 은은하게 퍼뜨려요. 이게 정장 슬리브에 비칠 때의 품위가 다릅니다.

가격대는 요즘 빈티지 데이트저스트 시세가 많이 올라서 부담스러웠는데, 다행히 리테일 프라이스보다는 조금 더 저렴한 수준에서, 상태값 하는 매물을 구할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 정도 오리지널 컨디션과 최근 오버홀 기록을 가진 80년대 하이빈트 빈티지를 이 가격에 데려온 건, 진짜 '득템'이라는 단어에 부끄럽지 않은 거래였던 것 같아요. 요즘 시계 박스 정리한다고 방출하는 분들이 간혹 계시던데, 저는 이 녀석은 평생 함께할 생각이라 조심스럽게 메인 와인딩 케이스 가장 좋은 자리에 모셔뒀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최근에 마음에 품었던 시계나 오래된 물건에 깃든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같이 나눠요. 요즘 같은 계절에 빈티지 시계와 니트의 조합만큼 무르익는 취미가 또 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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