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 · 득템
자크뮈스, 이게 그냥 트렌드라고? 직접 만져보고 생각이 좀 달라졌어요.
솔직히 고백하면 말이죠. 저는 한동안 자크뮈스를 좀 과대평가된 브랜드라고 생각했어요. SNS에서 워낙 로고 플레이가 강한 후디나 버킷햇 같은 게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린 친구들이나 좋아하는 일시적인 무드라고 치부한 구석이 있었거든요. 근데 요 며칠 전에 우연히 플래그십에 들어갔다가 딱 제 스타일을 관통하는 원피스를 만져보고는 생각이 싹 바뀌었습니다. 아니, 이 브랜드가 이렇게까지 소재와 핏에 진심일 줄은 몰랐네요.
제가 픽업한 건 이번 시즌에 나온 카멜 브라운 계열의 미디 원피스예요. 언뜻 보면 그냥 미니멀한 셔츠 원피스처럼 보이는데, 소재가 진짜 예술이더군요. 리넨과 비스코스를 거의 50대 50으로 블렌딩한 것 같은 촉감인데, 일반 린넨 특유의 뻣뻣하고 까끌거리는 느낌이 전혀 없어요. 실이 워낙 고운 걸 썼는지 손등으로 쓸면 마치 오래된 실크 슬립을 만지는 것처럼 보드라운데, 광택은 절제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깊이 있는 무광의 텍스처가 느껴집니다. 이런 소재는 보통 까르띠에 시계를 차고 다니시는 상속녀 스타일의 부유한 노부인들이 입는 빈티지 라운지웨어에서나 느껴봤던 거라, 기성복에서 이런 걸 만난 게 좀 놀라웠어요.
핏도 상당히 영리해요. 허리 라인에 억지로 절개선을 넣어서 몸을 조이는 게 아니라, 등판 전체에 걸린 절묘한 턱(tuck)과 뒷중심선의 솔기 하나만으로 옷이 몸을 따라 자연스럽게 낙하하는 실루엣을 만들어냈어요. 그래서 저처럼 어깨는 좁은데 골반이 있는 체형도 옷이 딱 붙지 않고 공기층이 살짝 생기면서, 마치 90년대 지안프랑코 페레 아카이브 피스를 입은 듯한 고급스러운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단추도 그냥 싸구려 플라스틱이 아니라, 살짝 무게감 있는 버팔로 혼(Horn) 비슷한 천연 소재 느낌의 단추를 써서 전체적인 톤을 무겁지 않게 잡아줬고요.
재밌는 건 이 옷을 딱 보자마자 '자크뮈스다!' 하는 로고는 어디에도 없다는 거예요. 케어 라벨에 작게 박힌 자수 말고는 브랜드를 과시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음. 이 지점에서 제 편견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그 유명한 로고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옷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피스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는 하우스인데, 굳이 시그니처를 강조한 피스들로 마케팅을 하는 건 젊은 감성의 전략일 뿐이구나, 싶더라고요.
사실 이 가격대면 빈티지 샤넬 부띠크 라인의 리넨 원피스나 한물간 에르메스 스포츠 라인 같은 것도 구할 수 있을 텐데, 이건 빈티지 특유의 '옷장 냄새'나 어깨 패드의 변형을 신경 쓸 필요 없이 지금 당장 현대적인 비율로 클린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을 즐길 수 있다는 게 강점인 것 같아요. 빈티지의 헤리티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뉴 빈티지'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런 피스라면 시간이 지나도 올드머니 뮤즈 같은 분위기를 잃지 않고 오래 입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 큰 맘 먹고 데려왔습니다.
혹시 저처럼 자크뮈스를 로고 놀이 잘하는 하이엔드 스트리트라고만 생각하셨던 분들이라면, 한 번쯤 플래그십에서 소재 위주의 심플한 라인을 직접 만져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생각보다 훨씬 헤리티지에 가까운 브랜드의 본심을 만나실 수도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