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 · 득템
결국 이번 시즌도 MA-1 입니다만, 이번 건 좀 다릅니다
날이 제법 쌀쌀해져서 작년에 공들여 구한 70년대 브리티시 RAF 무스탕을 꺼냈습니다. 보통 무스탕 하면 슬림한 블랙 진에 첼시 부츠로 깔끔하게 떨어뜨리는 정석 룩이 떠오르지만, 저는 오히려 그 완벽함이 부담스러워서 오늘은 일부러 빈티지 리바이스 501에 낡은 카키색 셰틀랜드 울 스웨터를 받쳐 입고 다녔죠. 근데 이상하게 올해는 마음이 좀 들떠서 그런지, 무스탕의 묵직한 맛도 좋지만 뭔가 좀 더 깔끔하고 드라이한 실루엣이 끌리더군요. 그래서 오랫동안 눈여겨보던 MA-1을 드디어 들였습니다.
사실 MA-1 보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너무 뻔하잖아요. 스키니진에 컨버스, 아니면 나름 멋 부린다고 세인트제임스 보더 티셔츠에 슬랙스 매치하는 그런 룩들. 물론 그게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착장이 주는 '너무 의도된 캐주얼'이 좀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좀 다른 걸 찾았습니다. 흔히 보는 알파 인더스트리즈의 현행 모델이나 일본 빅실루엣 복각판 말고, 진짜 올드한 맛이 나는 80년대 초중반산 오리지널을 우연히 만져보고는 그냥 충동적으로 질러버렸습니다.
이녀석의 매력은 단연 소재에서 옵니다. 요즘 나오는 것들은 원가 절감 때문인지 나일론이 좀 까슬거리고 반짝이는 느낌이 강한데, 이 빈티지 녀석은 손에 감기는 촉감부터 다릅니다. 66년형이 아닌 게 살짝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겉감은 세월을 먹어 적당히 납작하게 가라앉은 6온스 듀폰 나일론 66이 흐르는 듯 부드럽습니다. 새것처럼 빳빳하지 않아서 입자마자 몸에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그 느낌이란. 보통 빈티지 나일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특유의 광택이 죽고 약간 분필 같은 질감이 생기는데, 이 녀석은 보관 상태가 아주 좋아서 그게 과하지 않아요. 은은한 진회색 빛이 살아 있고요.
안쪽을 보면 더 반합니다. 라이닝이죠. 원조 MA-1의 상징인 오렌지색 인테리어가 보통은 강렬한 형광 오렌지에 가까운데, 이건 40년 가까이 묵으면서 톤이 한풀 죽은 코럴 오렌지입니다. 이게 진짜 맛이에요. 새것처럼 튀지 않고, 마치 잘 숙성된 와인처럼 차분한 깊이가 느껴지거든요. 충전재도 폴리에스터이긴 한데, 옛날 방식이라 그런지 지금처럼 과하게 뽕뽕 부풀어 오르지 않고 담요처럼 얇고 고르게 잡혀 있어서 실루엣이 훨씬 정갈합니다. 절대 두꺼운 니트는 못 받쳐 입을 것 같지만, 애초에 이 재킷은 레이어드보다 그냥 딱 떨어지는 실루엣 자체를 즐기는 맛이니까요.
이 재킷을 받아들고, 오늘 아침에는 좀 다르게 입어봤습니다. 다들 올블랙에 MA-1을 매치하는데, 저는 오히려 70년대 이스트 코스트 아이비리거들의 겨울 스타일을 조금 비틀어봤어요. 상의는 목이 약간 늘어진 구제 라코스테 케이블 니트를 받쳐 입었는데, 이게 올드머니 감성이 은근히 있으면서도 너무 오바되지 않아서 좋습니다. 하의는 빈티지 리바이스 501의 찐한 인디고가 아니라, 일부러 수수한 베이지 톤의 초코 캐치노 빈티지 치노 팬츠를 선택했어요. 발목에서 살짝 부츠컷 지는 형태로요. 여기에 발은 그냥 무심하게 로퍼를 신었습니다. 똑 떨어지는 보머와 적당히 루즈한 치노 팬츠의 실루엣이 꽤 괜찮더라고요.
소매 통도 재밌는 게, 요즘 복각판들처럼 팔뚝이 터질 듯 부풀려진 게 아니라 실제로 파일럿들이 G-1가죽 재킷 위에 걸칠 수 있도록 약간 넉넉하게 디자인된 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팔을 올렸을 때 겨드랑이 쪽이 당기지 않고 편안하네요. 요즘 패션 MA-1들은 활동성보다 룩을 위해 팔을 더 좁고 짧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오리지널은 확실히 실용적인 디테일이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지퍼 탭을 감싼 가죽 보강 부분도 그렇고, 담배를 말아 넣던 왼쪽 팔 지퍼 포켓 안쪽에 땀에 젖지 말라고 덧댄 작은 천 조각 디테일 하나하나가 군용품으로서의 헤리티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 수집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구매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건, 시간이 만든 색깔입니다. 밀리터리 특유의 올리브 그린이 오랜 세월 빛을 받아 톤 다운된 이 독특한 색은 무슨 짓을 해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뉘앙스예요. 마치 이탈리아 밀라노 근교에서 갓 주문한 캐시미어 니트가 뿜는 윤기와는 다른, 오직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연륜의 깊이라고 할까요. 이 색 때문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에도 불구하고 옷 자체가 꽤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아마 이번 겨울 내내, 또 장롱 깊숙이 처박아뒀던 체스터필드 코트보다 이 녀석의 손길이 더 잦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슬슬 마후라도 하나 장만해야겠어요, 빈티지 버버리 프라이어 리처드 체크로 너무 휘황찬란하지 않은 적당히 물 빠진 양모 소재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