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맵시

하울 · 득템

아니 시발 이번에 건진 머플러 미쳤다 진짜

무드보드미대·8.22·조회 62

아까 퇴근길에 그냥 무심코 들어간 빈티지 샵에서 이건 진짜 운명처럼 만났는데 빛바랜 아이보리도 아니고 누르스름한 크림오프화이트? 거기에 군데군데 실낱처럼 얇은 블랙사가 섞여서 마치 정적 속에서 올이 풀려나가는 순간을 짜넣은 것 같은 직조감

손에 쥐었을 때 무게감이 진짜 예술이었음 뻣뻣하게 풀 먹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헐렁하게 힘 빠진 것도 아니고 천이 중력에 실려서 천천히 손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궤적 자체가 하나의 드레이핑이 완성되는 기분

가격은 3만원대 후반이었는데 이 정도 텍스처에 이 컬러감이면 거의 헐값에 주워온 거지 아마 90년대쯤 유럽 쪽 니트 공장에서 나온 데드스탁 같은데 보풀 하나 없이 상태도 미침

집 와서 바로 룩에 올려봤는데 블랙 오버사이즈 발마칸 코트 안에 이 머플러를 두르니까 존나 아이코닉하더라 원래 이런 르 코르뷔지에 건축물마냥 차가운 직선 실루엣에 익숙한 사람인데 이 머플러 하나가 개입하니까 갑자기 공간 전체가 와해되면서 부드러운 붕괴가 일어나는 느낌

특히 목에 감는 방식이 중요한 게 난 절대 깔끔하게 한 번 반 접어서 구멍에 쏙 넣는 거 안 함 그냥 목에 한 번 건 다음에 한쪽 끝을 좀 길게 늘어뜨리고 나머지 한쪽은 어깨 뒤로 살짝 넘기는 정도 그러면 앞판에 생기는 비대칭 레이어가 코트의 구조적인 무게랑 대비되면서 진짜 묘한 긴장감이 생겨

사진으로 못 보여주는 게 한스러운데 이 머플러의 진짜 미친 포인트는 은은하게 섞인 블랙사가 빛 각도에 따라서 유령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는 거 마르지엘라 레이블 태그 떼어낸 그 흰색 니트들 있잖아 그거랑 정반대의 미학인데 이상하게 같은 계보에 있는 느낌 존재를 지워서 완성하는 게 아니라 흔적을 남겨서 완성하는 텍스처

다음주에 비 온다니까 이 머플러에 릭 오웬스 스타일 드리피 진이랑 낡은 더비슈즈 매치해볼 생각 쇄골 위로 천이 흘러내리는 실루엣이랑 발목에서 주름지는 바지단의 낙차가 서로 호흡할 것 같아서

아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머플러 고를 때 꼭 확인해야 하는 게 단 끝부분 마감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임 프린지 형태로 풀려있는 애들은 시간 지나면 올이 죽어서 힘없이 축 처지는데 이번에 건진 애는 롤엣지 처리가 돼서 장력이 끝까지 살아있음 이게 은근히 전체적인 드레이핑 무게감을 좌우함 꿀팁

암튼 오늘 득템은 대만족 내일 당장 이 조합으로 출근각

댓글 2

  • 명품덕후8.22

    그 직조감이 오트쿠튀르라도 된다는 듯이 좀 오버하게 느껴질 때도 있더라. 소재에서 풍기는 긴장감이 의외로 목에 두르면 뻣뻣하게 설 수 있어서, 진짜 좋은 캐시미어 특유의 유연한 드레이프랑은 결이 다르더라고.

  • 발레코어연8.23

    아... 방금 그 머플러 만져보신 그 촉감 묘사에 나도 모르게 손목이 시려웠어요. 살짝 거친 듯하면서도 중력에 실려 흘러내리는 무게감이라니, 저도 딱 그런 걸 찾고 있었거든요. 빈티지 니트류는 보통 올이 너무 풀려서 힘없이 늘어져 있거나 반대로 까슬하게 경직된 게 많은데, 글쓴님이 말한 것처럼 "정적 속에서 올이 풀려나가는 순간을 짜넣은" 그 직조감이라면 진짜 보물 건지신 거예요. 특히 크림오프화이트 베이스에 얇은 블랙사가 실낱처럼 섞여있다는 부분에서 완전히 꽂혔어요. 그런 색감이면 그냥 무채색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깊이 같은 게 생기잖아요. 요즘 날씨에 검정 발레 플랫에 살구색 발목 양말 살짝 보이게 신고, 밑단 올이 자연스럽게 풀린 데님 미니스커트 입은 다음에 이 머플러만 칭칭 둘러도, 그 약간의 블랙사가 전체적으로 톤을 잡아주는 연결고리 역할 할 것 같아서 진짜 부러워요. 저는 이런 거 보면 꼭 브랜드 태그 확인하는데, 혹시 케어라벨에 아사안 울(Aswan wool) 같은 희귀 소재명 적혀있지 않나요? 제 경험상 이런 빈티지 숍에서 나오는, 염색이 완벽하게 균일하지 않은 살아있는 듯한 아이보리 계열은 원사 자체가 좋은 경우가 많아서 괜히 물어봐요. 아... 진짜 운명적인 만남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댓글을 쓰려면 로그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