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맵시

오늘의 착장

빈티지 캐시미어 코트 아래, 의외로 10년 된 스니커즈를 신는 이유

빈티지록셔리·8.30·조회 28

요즘 날씨에 어떻게 입어야 할지 참 애매해서 아침마다 옷장 앞에 한참 서있게 되더라고요. 사실 저는 거의 15년 넘게 올드머니나 헤리티지 계열 빈티지만 고집해와서, 스니커즈나 운동화는 제 사전에 없는 아이템이었거든요. 근데 최근에 무릎이 좀 안 좋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편한 신발을 찾다 보니까, 예전에 일본에서 충동구매했던 빈티지 운동화 하나를 다시 꺼내게 됐어요.

사실 이 신발을 처음 샀을 때만 해도 "그래, 이건 주말에 동네 산책할 때나 신어야지" 하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신어보니까 이게 웬걸, 제가 평소에 입는 것들과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리더라고요. 물론 아무 스니커즈나 되는 건 아니고요. 제가 고른 건 1990년대 후반쯤에 나온 이탈리아제 올화이트 레더 스니커즈인데, 지금 보면 디테일이 정말 예술이에요. 요즘 나오는 것들처럼 로고가 크게 박혀있거나 실루엣이 과하지 않고, 진짜 얇은 송아지 가죽을 통으로 깎아서 만든 건지 주름이 자연스럽게 잡히는 느낌이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밑창도 고무인데 저반발인지 걸을 때마다 쿠션감보단 단단하게 받쳐주는 느낌이고.

이걸 어떻게 입나 고민을 좀 했는데, 의외로 답은 단순하더라고요. 제일 잘 어울렸던 조합이 딱 하나 있는데, 오래된 린넨 혼방 더블 브레스트 수트에 아무것도 안 받쳐입고 맨살에 걸치고, 그 안에 입은 건 빈티지 면 티셔츠 하나. 여기에 이 흰 스니커즈 신으니까 신기하게도, 정장이 갑자기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캐주얼에 굴복한 느낌도 아니고, 묘하게 중간의 긴장감이 생기더군요. 수트 자체가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 나온 걸로 아는데, 어깨 패드도 없고 소매가 살짝 짧게 떨어져서 원래부터 약간 비틀린 멋이 있는 녀석이라 그런지 잘 맞았어요. 바지는 통이 넓고 접어서 컷을 살짝 올렸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렇게 입기 전까지는 운동화를 제대로 된 룩에 매치하는 걸 굉장히 얕잡아봤어요. '그건 진정한 럭셔리가 아냐, 가죽 로퍼나 옥스퍼드가 격을 만든다' 같은 편견이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코디 한 번 해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네요. 운동화 자체가 가진 헤리티지가 있으면, 아니 적어도 그 신발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스토리가 담겨 있으면 고급스러움이 절대 깎이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너무 완벽하게 맞춰입은 느낌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려주니까 진짜 잘 사는 사람들 특유의 '아무렇지 않은데 왠지 모르게 완성된' 그런 분위기가 생기는 거 같아요. 말로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데.

  • 소재가 자연스러운 걸 골라야 해요. 나일론 메쉬나 무광 가죽은 괜찮았는데, 반짝이는 패턴 가죽이나 PVC 코팅된 건 절대 무리였어요. 제가 가진 코트나 재킷이 전부 자연 원단이다 보니까, 신발 소재가 날이 서면 그 이질감이 정말 쉽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 색은 늘 고민인데, 전 올화이트 아니면 1980년대 독일 군화 훈련화 스타일의 베이지 고무창 조합까지만 허용하기로 했어요. 아이보리 계열로 때 탄 것도 생각보다 차분하니 괜찮고요, 순백은 좀 어려워요. 특히 흰 양말이랑 같이 신으면 진짜로 골프 치러 가는 사람 되는 함정이 있어서, 이 부분은 양말 안 신거나 아예 발목만 덮는 실크 삭스로 겨우 살렸네요.

  • 기장 진짜 중요합니다. 이 얘긴 계속 하게 되네요. 바지통이 넓을수록 신발이 살짝 덮이는 정도로 끝나는 게 가장 예뻤어요. 스트레이트 진이라면 밑단 한 번 접어서 복숭아뼈 바로 위에서 끝내주면 좋고요. 제 체형이 허리가 긴 편이라 바지 길이 잘못 건드리면 다리가 확 짧아보여서 이 부분은 진짜 수선 맡기면서까지 신경 썼어요. 요즘은 안 입는 청바지 하나 갖고 재단사 분이랑 실랑이도 좀 했네요.

아, 그리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인데. 이 흰 스니커즈를 신고 코트 자락 휘날리며 걸으면, 발걸음 소리가 좀 부드러워져요. 가죽 굽 소리 특유의 딱딱 끊기는 리듬이 아니라 뭔가 쓸리듯이 이어지는 그 마찰음이 묘하게 길거리에서 편하게 해주고. 나이가 드니까 구두 소리마저 좀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이런 사소한 위안 때문에라도 계속 손이 가는 아이템이 됐어요.

혹시 평소에 클래식하게만 입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 번쯤 이 스니커즈 섞는 것도 정말 괜찮은 변주라고 감히 추천드리고 싶어요. 진짜로 빈티지 운동화를 파는 곳은 아직 가격대가 좀 있긴 한데, 그냥 동네 빈티지샵에서도 의외로 유럽 쪽에서 넘어온 올드 스톡 같은 게 3만원대에서 5만원대 사이로 숨어있으니 한 번쯤 둘러보세요. 요즘 대기업 협업으로 나오는 10만원 넘는 흰 스니커즈들보다 오히려 몇십 년 전 무명 브랜드의 무광 레더 제품이 훨씬 제 몸에는 잘 붙더라고요.

글이 길어졌네요. 다들 오늘 하루도 편안한 옷, 편안한 신발 신고 기분 좋게 다니시길 바라요. 저는 이만 커피 한 잔 하고, 좀 전에 얘기한 청바지 수선 찾으러 가봐야겠네요.

댓글 5

  • 프레피보이8.30

    나이 들수록 결국 발이 우선이더라. 어설픈 쿠션깔창보다 제대로 된 빈티지 러닝화 하나가 오히려 더 단정해 보일 때가 있지.

  • 트렌드안테나8.30

    오 이거 완전 내 스타일 ㅋㅋㅋ 빈티지 캐시 코트에 낡은 러닝화 조합 요즘 스트릿스냅에서도 진짜 많이 보이더라 컬러만 좀 톤온톤으로 맞추면 살짝 올드머니에 꾸안꾸 무드 완성이라 부럽다 15년 된 코트면 올 진짜 장난아니겠네

  • 톤온톤지기8.31

    아, 그 빈티지 운동화의 에이징된 러버 솔이 오히려 캐시미어의 무심한 질감을 건드리지 않아서 알맞네요.

  • 다크아카데미아9.1

    아... 이 글 보니까 진짜 가슴 깊은 데서 올라오는 무언가가 있네. 나도 거의 비슷한 길을 걸어왔어서 그런지, 그 빈티지 코트 아래 깔리는 의외의 쿠션감이라는 게 얼마나 복합적인 결이 있는 건지 이해된다. 솔직히 나도 예전에는 플랫슈즈나 로퍼 아니면 신발이라 부를 수 없다는 이상한 고집이 있었거든. 트위드 자켓에 가죽 솔이 달린 로퍼 말고는 뭘 신어도 내 발이 아니라는 느낌. 그런데 작년 겨울에 발바닥 근막염 비슷하게 왔을 때, 어쩔 수 없이 쿠션 있는 스니커즈를 신어야 했는데 그때 느꼈어. 의외로 그 낡고 헤진 캔버스 스니커즈에서도 어떤 '시간의 층'이 보인다는 걸. 특히 빈티지 운동화는 밑창 고무가 굳은 느낌, 천이 누렇게 빛바랜 그 색감이 오히려 새것보다 깊이가 있더라. 그게 오래된 코트의 어깨선이나 마모된 소매 끝단이랑 은근히 대화를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15년 된 헤리티지 코트 아래의 운동화는 그냥 편함 때문만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헤리티지가 겹쳐지는 순간인 것 같아. 특히 가을빛이 짙어질수록 코트의 묵직함이랑 스니커즈의 낡은 천 질감이 만들어내는 부조화 속에 어떤 균형이 생겨서, 걷는 템포도 미묘하게 달라지더라. 예전엔 구두굽 소리를 들으며 걷는 게 루틴이었다면, 이젠 발바닥으로 지면의 요철을 조용히 음미하는 그런 느낌. 이런 조합은 확실히 삶의 어느 한 켠에 무릎이나 허리에 대한 작은 타협이 들어오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변화인 것 같고, 그걸 억지로 예전 방식대로 누르지 않고 받아들였을 때 오히려 스타일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그런 지점. 앞으로도 계속 흐릿한 날, 쌀쌀한 바람 속에서 그 코트와 운동화 조합이 어떤 얼굴로 익어갈지 궁금하다.

  • 산악부고프코어9.1

    아이고, 무릎 생각하면 당연한 선택이죠. 근데 저도 살로몬 신다가 쿠셔닝 아예 없는 빈티지 스니커즈로 갈아타면 발바닥이 먼저 고장날 것 같아서 못 신겠더라고요ㅋㅋㅋ 진짜 미드솔 삭아서 딱딱해진 거 신으면 충격이 무릎으로 직행이라 그나마 푹신한 인솔 깔아주는 게 그나마 낫지 않나 싶네요. 그래도 저런 코트에 빈티지 운동화 꺼내는 믹스매치 감각은 진짜 인정, 저도 다음에 테크웨어 자켓에 콘트라스트로 한번 따라해 봐야겠음.

댓글을 쓰려면 로그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