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장
마르지엘라 90년대 패딩 조끼 하나 건졌습니다, 입을수록 빈티지 패딩의 깊이가 다르네요
요즘 날씨가 참 애매하죠, 코트를 걸치기엔 낮에 해 들면 덥고, 그렇다고 스웨터 하나만 걸치기엔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이런 환절기에 십수 년째 제 구원투수 역할을 해주는 게 패딩 조끼더라고요. 특히 올해는 우연히 일본 빈티지 샵에서 데드스탁급으로 건진 마르지엘라 1999년쯤? 라인인지, 암튼 그 시절 밀리터리 라이너에서 모티브 딴 초경량 패딩 조끼가 주인공입니다.
사실 패딩조끼라고 하면 흔히들 유니클로 그 경량조끼 떠올리시잖아요, 물론 그거야 실용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스타일링에서 포인트를 잡기엔 너무 무심한 소재감이 늘 아쉬웠거든요. 근데 이 아이는 달라요, 겉감이 그 시절 마르지엘라 특유의 사각거리는 초고밀도 나일론인데 광택이 거의 없이 뽀송뽀송한 표면이 마치 종이 같다고 해야 하나. 그 안에 충전재는 오리털 90에 깃털 10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털이 더 숙성됐는지 요즘 나오는 경량 패딩 특유의 그 과장된 부풀림이 아니라 몸을 감싸는 듯 얇지만 묵직한 볼륨감이 살아있어요. 이게 진짜 올드 C.P. 컴퍼니 구스 라이너 같은 헤리티지 피스에서나 느껴지는 터치라, 보자마자 그냥 심장이 철렁했습니다.
코디는 의외로 정공법으로 풀었어요. 이너로는 작년 겨울에 테일러드에서 맞춘 두께감 있는 브리티시 밀라노 저지 니트를 입었는데, 이게 핏이 몸에 비스듬히 붙는 게 아니라 적당한 공간을 두고 떨어지는 드레이프성 니트라서 조끼가 너무 스포티하게 붕 뜨지 않더라고요. 색은 다크 네이비. 그리고 하의는 1980년대 미군 울 필드 팬츠인데, 이게 골반 위로 딱 걸리는 하이 웨이스트에 다리 라인은 와이드하게 퍼지는 바지라서, 상체가 조끼로 짧게 끊겨도 다리 라인이 길어 보이는 착시가 생깁니다. 여기에 신발은 파라부트 미카엘 블랙 스무스 레더, 가방은 3만원대에 산 노메모리 바이널 토트백. 이 가방이 포인트인데, 바이널 특유의 저렴하고 글로시한 질감이 오히려 빈티지 마르지엘라랑 붙이니까 이상하게 톤이 맞물리면서 세련되게 헐거운 느낌을 주더라고요.
솔직히 패딩조끼라는 아이템이 자칫 잘못 입으면 동네 슈퍼 가는 복장이나 등산복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거든요. 그걸 피하려면 이너의 소재감과 하의의 실루엣으로 최대한 텐션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 같아요. 캐시미어 니트, 실크 셔츠, 아니면 적어도 적당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코튼 포플린 셔츠 정도는 받쳐줘야 그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여러분도 혹시 서랍 속에 묵혀둔 패딩조끼 있다면, 이너를 절대 궁상맞은 기모 맨투맨 같은 걸로 때우지 마시고 조금 무게감 있는 소재로 붙여보세요. 생각보다 훨씬 럭셔리한 레이어드가 나올 거예요. 아, 참고로 이 조끼는 진짜 운이 좋아서 상태 극상에 가격도 저렴하게 업어왔는데, 빈티지 패딩은 보관 상태가 생명이니까 혹시 구입하실 거면 털 뭉침이랑 겉감 경화 여부 꼭 체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