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장
장마 끝물, 오래된 라이더 재킷을 꺼내며...
장마라 그런지 요즘 러닝도 못 뛰고 헬스장에만 갇혀 있는데... 트레이닝복이 죄다 나일론에 로고 범벅이라 문득 제 옷장이 너무 거칠게 느껴지더군요. 땀 배출 생각하면 당연히 기능성 소재가 맞는 건 아는데, 이왕 운동하는 시간마저 조금은 우아하게 보내고 싶어서요. 저는 일단 작년에 구한 90년대 초반 생산된 쉬운트의 램스킨 라이더 재킷을 오랜만에 꺼내 입었어요. 비가 그친 저녁, 습도가 조금 낮아진 틈을 타서 말이죠.
이 재킷은 정말 오래됐지만 램스킨 특유의 부드러운 광택과 가벼운 무게감 때문에 여름 끝자락부터 입기 시작하는 편입니다. 카우 하이드처럼 딱딱하지 않아서 어깨에 걸치는 순간 몸에 착 감기는 느낌이에요. 연식이 있다 보니 칼라 부분과 소매 끝단은 자연스럽게 마모가 진행돼서 스웨이드처럼 보들보들해진 부분이 있는데, 그게 오히려 새 제품에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깊이를 주더군요. 안감은 큐프로 원단이라 여름에도 땀에 달라붙지 않아서 꽤 쾌적하고요.
하의는 이 재킷의 무게감을 받쳐줄 수 있게 80년대 말 데드스탁으로 들인 폴로의 플리츠 치노 팬츠를 골랐어요. 허리 부분에 탭이 달려 있고 통은 넉넉한데 바지통이 갑자기 좁아지지 않고 일자로 떨어지는 실루엣이라 무겁지 않게 흘러내려요. 이 바지도 구하기 쉽지 않아서... 작년 겨울 내내 빈티지 샵 세 군데 돌아다닌 끝에 발견한 거라 애착이 남다릅니다. 원단은 면100 트윌인데 워싱이 거의 되지 않은 상태로 보관돼서 빳빳한 질감이 살아 있어요. 이 빳빳함이 상체의 부드러운 램스킨과 대비를 만들어줘서 코디에 긴장감을 줍니다.
이너는 그냥 흰색이 제일 무난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90년대 오프닝 세레모니 실크 블렌드 반팔 셔츠를 받쳐 입었어요. 칼라가 일반 셔츠보다 살짝 높고 넓은데, 이걸 라이더 재킷 밖으로 빼내니까 뻣뻣한 가죽 사이로 은은한 광택이 비치면서 꽤 고급스러워 보이더군요. 셔츠 원단을 좀 더 무겁고 광택 있는 울 실크로 가면 확실히 교복 티가 빠져서 좋아요. 이 정도면 뭐... 어디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거나, 아니면 비 내린 거리를 산책할 때도 부담 없을 것 같아요.
신발은 뭐, 고민하다가 결국 장마 때문에 포기하고 러버 솔이 두꺼운 로퍼를 신었습니다. 1995년 영국 생산된 닥터마틴 로퍼인데, 가죽은 착용감이 좀 빡빡해서 아직도 길들이는 중이에요. 그래도 두꺼운 솔 덕분에 살짝 젖은 바닥도 무섭지 않고, 전체적으로 시니컬한 느낌을 줘서 라이더 재킷의 분위기랑 잘 어울렸다고 생각해요. 액세서리는 번잡하게 하지 않고, 할머니한테 물려받은 1960년대 오메가 콘스텔레이션 파이팬 빈티지 시계 하나만 착용했습니다. 가죽 줄이 아니라 메탈 브레이슬릿 모델이라, 가죽 재킷 옆에서 번쩍이는 느낌이 은근히 포인트가 되더군요.
가죽 재킷은 보통 겨울이나 가을에만 생각하기 쉬운데, 저는 오히려 습도가 조금만 내려가면 이렇게 가볍게 걸치는 걸 선호합니다. 램스킨이나 송아지 가죽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소재로 된 빈티지 피스들은 지금 같은 환절기에 제값을 하는 것 같아요. 혹시 이런 날씨에 가죽 재킷 어떻게들 입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다들 비 오는 날 가죽 관리하면서 조심히 입으시는 팁 같은 것도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귀찮아서 그냥 말 타기 전에 발라주는 미네랄 오일 살짝 바르고 끝내는데,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