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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오늘의 착장

장마 직전, 낡은 첼시 부츠와 실크 셔츠의 조합이 주는 위로.

빈티지록셔리·6.26·조회 33
  • 요즘 날씨가 참 오락가락이라 아침에 옷 고르기가 더 힘들더라고요. 괜히 두꺼운 거 꺼내면 오후에 후회하고, 그렇다고 너무 얇으면 아침 바람에 움츠러들고. 이런 애매한 환절기에는 결국 발목에서 실루엣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에 제일 구석에 넣어둔 첼시 부츠를 꺼냈습니다.

  • 사실 이 부츠는 90년대 중후반쯤 영국에서 나온 노스햄튼 소산 마크업 없는 데드스탁인데요. 가죽이 진짜 세월을 먹어서 광택은 거의 죽고 대신 깊고 건조한 균열이 잡혔어요. 제가 첼시 부츠를 고를 때 제일 중요하게 보는 게 바로 이 사이드 고무 패널의 밀도와 형상 기억력이거든요. 싼 것은 신고 벗을 때마다 고무가 늘어나서 복숭아뼈 위가 헐렁해지는데, 이 친구는 거의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여전히 발목을 타이트하게 잡아줘요. 착화감이 마치 낡은 스웨이드 장갑 같달까요.

  • 코디는 오늘 좀 과감하게 90년대 헬무트 느낌으로 가봤어요. 베이지 이 거의 다 바래서 아이보리에 가까운 실크 블렌드 오버사이즈 셔츠를 걸치고, 하의는 기장이 엄청 긴 70년대 데드스탁 울 개버딘 와이드 팬츠를 접지 않고 그대로 끌어내렸어요. 여기에 부츠 코가 약간 스퀘어 토라서 바지 끝이 걸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툭 떨어지는 느낌. 실루엣 자체의 힘이 참 좋죠.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옷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느낌이에요.

  • 사람들이 보통 첼시 부츠를 슬랙스에 넣어서 깔끔하게 신는 걸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이 와이드 팬츠에 발목만 살짝 드러나는 연출이 더 헤리티지의 본질에 가깝다고 봐요. 마치 오래된 재규어의 우드 대시보드 아래에 숨겨진 수동 기어 노브를 보는 기분이랄까. 이 부츠의 가장 묘한 매력은, 겉은 완전히 죽어있지만 걷는 순간 바지춤 사이로 살짝 보이는 가죽의 깊이에요. 그건 아무리 비싼 새 신발로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연식에서 오는 깊이거든요.

  • 소재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비 오기 직전이라 습도가 높은 날씨에 이 개버딘 울 바지가 진가를 발휘해요. 약간 습기를 머금으니 오히려 직물의 밀도가 살아나면서 구김이 자연스럽게 펴지고, 실크 셔츠는 피부에 달라붙지 않아서 답답함이 없어요. 진짜 이런 날에는 하이게이지의 면 셔츠 입으면 금방 축축하게 느껴지는데, 이 조합은 바람은 막고 열기는 배출하는 느낌이에요.

  •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부츠 밑창을 작년에 비브람으로 교체하면서 약간의 아웃솔 두께감이 생겨서 원래의 슬렌더한 실루엣이 조금은 무뎌진 거예요. 구두수선소 사장님께서 미끄럼 방지 층을 너무 두텁게 올리셔서... 그래도 뭐, 비 오는 날 미끄러져서 허리 다치는 것보다는 낫죠. 이런 걸 보면 빈티지를 제대로 오래 신으려면 구조적인 타협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것 같아요.

  • 오늘처럼 애매한 날씨에, 여러분도 옷장 속에서 오래 전 사두고 잊은 첼시 부츠 한번 꺼내보세요. 딱 새 신발 같은 완벽함을 기대하기보다는, 낡은 가죽이 발목을 감싸는 그 애틋한 밀착감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그게 진짜 올드머니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새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낡은 것과 함께 늙어가는 기쁨이랄까요. 꾸미지 않은 듯 완성된 이 기분,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댓글 1

  • 워킹맘코디6.28

    저도 요즘 같은 애매한 날씨엔 결국 신발이랑 아우터로 분위기 조절하게 되더라고요. 낡은 첼시 부츠 특유의 적당히 길들여진 광택이 실크 셔츠랑 만나면 진짜 묘하게 고급스러운 위로가 있죠. 혹시 바지는 어떤 느낌으로 매치하셨어요? 저는 오늘 부츠에 살짝 세미 와이드 진 입었는데 실루엣이 생각보다 차분해서 깜짝 놀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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