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장
장마 직전, 낡은 첼시 부츠와 실크 셔츠의 조합이 주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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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날씨가 참 오락가락이라 아침에 옷 고르기가 더 힘들더라고요. 괜히 두꺼운 거 꺼내면 오후에 후회하고, 그렇다고 너무 얇으면 아침 바람에 움츠러들고. 이런 애매한 환절기에는 결국 발목에서 실루엣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오랜만에 제일 구석에 넣어둔 첼시 부츠를 꺼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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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부츠는 90년대 중후반쯤 영국에서 나온 노스햄튼 소산 마크업 없는 데드스탁인데요. 가죽이 진짜 세월을 먹어서 광택은 거의 죽고 대신 깊고 건조한 균열이 잡혔어요. 제가 첼시 부츠를 고를 때 제일 중요하게 보는 게 바로 이 사이드 고무 패널의 밀도와 형상 기억력이거든요. 싼 것은 신고 벗을 때마다 고무가 늘어나서 복숭아뼈 위가 헐렁해지는데, 이 친구는 거의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여전히 발목을 타이트하게 잡아줘요. 착화감이 마치 낡은 스웨이드 장갑 같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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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디는 오늘 좀 과감하게 90년대 헬무트 느낌으로 가봤어요. 베이지 이 거의 다 바래서 아이보리에 가까운 실크 블렌드 오버사이즈 셔츠를 걸치고, 하의는 기장이 엄청 긴 70년대 데드스탁 울 개버딘 와이드 팬츠를 접지 않고 그대로 끌어내렸어요. 여기에 부츠 코가 약간 스퀘어 토라서 바지 끝이 걸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툭 떨어지는 느낌. 실루엣 자체의 힘이 참 좋죠. 정말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옷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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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보통 첼시 부츠를 슬랙스에 넣어서 깔끔하게 신는 걸 생각하는데, 저는 오히려 이 와이드 팬츠에 발목만 살짝 드러나는 연출이 더 헤리티지의 본질에 가깝다고 봐요. 마치 오래된 재규어의 우드 대시보드 아래에 숨겨진 수동 기어 노브를 보는 기분이랄까. 이 부츠의 가장 묘한 매력은, 겉은 완전히 죽어있지만 걷는 순간 바지춤 사이로 살짝 보이는 가죽의 깊이에요. 그건 아무리 비싼 새 신발로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연식에서 오는 깊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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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비 오기 직전이라 습도가 높은 날씨에 이 개버딘 울 바지가 진가를 발휘해요. 약간 습기를 머금으니 오히려 직물의 밀도가 살아나면서 구김이 자연스럽게 펴지고, 실크 셔츠는 피부에 달라붙지 않아서 답답함이 없어요. 진짜 이런 날에는 하이게이지의 면 셔츠 입으면 금방 축축하게 느껴지는데, 이 조합은 바람은 막고 열기는 배출하는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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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아쉬운 점은, 부츠 밑창을 작년에 비브람으로 교체하면서 약간의 아웃솔 두께감이 생겨서 원래의 슬렌더한 실루엣이 조금은 무뎌진 거예요. 구두수선소 사장님께서 미끄럼 방지 층을 너무 두텁게 올리셔서... 그래도 뭐, 비 오는 날 미끄러져서 허리 다치는 것보다는 낫죠. 이런 걸 보면 빈티지를 제대로 오래 신으려면 구조적인 타협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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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애매한 날씨에, 여러분도 옷장 속에서 오래 전 사두고 잊은 첼시 부츠 한번 꺼내보세요. 딱 새 신발 같은 완벽함을 기대하기보다는, 낡은 가죽이 발목을 감싸는 그 애틋한 밀착감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그게 진짜 올드머니의 태도라고 생각해요. 새것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낡은 것과 함께 늙어가는 기쁨이랄까요. 꾸미지 않은 듯 완성된 이 기분,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