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장
모헤어 비니 하나로 겨울 아우터가 달라지는 순간
며칠 전에 우연히 들른 동묘 구제 상가에서 만난, 연식이 꽤 된 모헤어 비니 하나가 오늘 장의 시작이었어요. 색은 딱 바랜 카멜 브라운인데, 손으로 만져보면 약간 까슬한 질감 사이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광택이 살아있더라고요. 아마 80년대쯤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데, 라벨은 이미 닳아서 흐릿하고 전체적으로 모헤어 특유의 복슬복슬한 솜털은 좀 죽었지만, 오히려 그 빈티지 특유의 부드러운 마모감이 요즘 새것에서는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결을 갖고 있더라고요.
이 비니 하나에 오늘 코디의 중심을 맞췄는데, 의외로 이런 올드한 액세서리가 현대적인 아우터를 어떻게 잡아주는지 직접 느껴서 길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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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터는 지난달에 장만한 아이보리 컬러의 하프 코트인데, 시미어 90에 실크 10 혼방이라 광택이 좀 과할 때가 있어요. 이게 보통은 단정하게 손목시계에 진주 팔찌 레이어드하고 깔끔하게 입는 편인데, 오늘은 일부러 이 빈티지 비니를 올려봤어요. 코트의 깃이 좀 넓게 떨어지는 디자인이라, 비니를 살짝 뒤통수 쪽으로 눌러쓰고 앞머리는 그냥 러내리게 내버려뒀어요. 그러면 코트 깃 라인이랑 비니에서 흘러내리는 실루엣이 맞물리면서, 고급스러운 외투가 갑자기 70년대 파리지엔느의 헐렁한 아침 산책 룩처럼 바뀌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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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는 작년 연말에 일본에서 데려온 90년대 초반 폴로 랄프 로렌의 크림색 터틀 니트인데, 이게 면 100인데도 워싱을 수십 번 했는지 감촉이 거의 실크처럼 미끄러워요. 살짝 누렇게 바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아이보리 직전의 톤이라, 위에 말한 코트랑 톤온톤 매치가 자연스럽고요. 암홀이 좀 널널하게 떨어지는 90년대 실루엣이어서, 이 터틀넥 위로 비니의 바랜 카멜 빛이 떨어지니 얼굴 주변이 확 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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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는 여유 있는 핏의 모직 팬츠, 차콜에 가까운 그레이인데 여기도 20수 정도의 고밀도 직조라서 실내 조명 아래선 무광으로 보이다가 밖에 나가면 은은하게 실키한 결이 보이는 재미있는 소재예요. 허리 라인이 높아서 니트를 넣어 입었고, 밑단은 살짝 말리게 접어서 발목 라인을 보여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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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은 다크 브라운의 로퍼인데, 여기서 포인트를 하나 더 줬어요. 평소에는 안 보이던 발목 위로, 집에 굴러다니던 올리브 톤의 실크 트윌리를 감아봤어요. 연식 있는 거라 군데군데 실크 특유의 반짝임이 죽고 마모된 부분이 있는데, 이게 로퍼의 광택이랑 묘하게 대비되면서 위에 쓴 비니의 모헤어랑도 재질감으로 이어진다고 해야 하나... 사진이 없어서 설명이 어렵네요. 그냥 발목에서 살짝 러내리는 실크의 물결이 걸을 때마다 바지 밑단에 닿는 모양새가, 아침에 급하게 나오면서 한 생각이 맞았구나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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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은 작년부터 애용하는 70년대 중반쯤 이탈리아제 빈티지 숄더백인데, 부테로 가죽 특유의 깊은 버건디 러가 지금은 거의 에스프레소에 가깝게 숙성됐어요. 스트랩은 원래 짧은 편인데 저는 키가 작아서 오히려 골반 바로 위에 딱 걸려요. 여기에 카멜 비니랑 같이 놓으면, 이 두 브라운 계열의 미묘한 톤 차이가 꽤 괜찮게 읽히더라고요.
확실히 비니라고 하면 캐주얼한 울 스나 아크릴 니트 소재가 대부분인데, 연식 있는 모헤어처럼 소재 자체에서 세월이 묻어나는 걸 고르면 전혀 다른 무드가 나오는 것 같아요. 요즘 같은 환절기에는 아우터가 무거워지기 전에, 오히려 세서리 하나로 전체 톤을 낮추는 방법도 제법 만하네요. 손목에 두르는 트윌리도, 발목의 실크 스카프도 결국은 위아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라서... 이런 디테일들이 쌓이다 보면 평범한 코트와 터틀넥도 내 취향의 빈도로 완성되는 기분이 들어요.
혹시 여러분은 비니 고를 때 소재를 어디까지 따져보시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거의 모헤어나 캐시미어, 아님 정말 연식 깊은 램스울 위주로 보는데, 아크릴도 의외로 70~80년대 제품 중에 촉감이 좋은 게 있더라고요. 그런 거 발견하시면 제보 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