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장
오늘은 좀 무겁게... 빈티지 트위드와 낡은 진주로 버무린 가을 저녁
요즘 올드머니니 콰이어트 럭셔리니 하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이는 것 같아서 좀 씁쓸할 때가 있어요. SNS에서는 그냥 베이지색 린넨에 로고 없는 검정 가방 들면 다 올드머니라고 하더라고요. 정작 진짜 올드머니들은 로고 없는 낡은 바버 재킷이나 할아버지 대 물려입은 듯한 헤링본 트위드를 걸치고, 손때 묻은 가죽 서류가방을 드는데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늘 옷장에서 꺼낸 것도 자연스레 무거운 것들뿐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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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터는 70년대 후반쯤으로 추정되는 영국제 헤링본 트위드 재킷입니다. 정확한 브랜드는 안쪽 라벨이 닳아서 모르겠어요. 어깨는 약간 드롭 숄더인데 패드가 과하지 않아서 체격을 과장하지 않고, 소매는 팔목에서 한 번 꺾어 입었을 때 안쪽 실크 안감이 살짝 비치는 정도. 소재가 생각보다 거칠지 않아서, 니트 위에 걸쳐도 불편함이 없어요. 등 쪽 견장 부분이 약간 닳아 있는데 이게 또 보는 사람에 따라 허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게 이 옷의 연륜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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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는 캐시미어 폴로 니트. 작년 겨울에 일본에서 데려온 빈티지인데 브랜드보다 실 뭉침 상태랑 게이지 보고 골랐어요. 목 부분 리브가 살아 있어서 첫 단추 풀었을 때 깃이 힘없이 퍼지지 않아요. 저처럼 체형이 마르고 어깨가 좁은 사람은 이런 깃이 받쳐주는 느낌이 꽤 도움됩니다. 색은 바랜 카멜, 정확히는 연초에 가까운 톤이라 얼굴색이 칙칙해 보일 법도 한데 이상하게 오늘은 화사하게 받아주네요. 이런 날은 그냥 운이 좋은 거라 생각하고 감사하게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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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는 챠콜 그레이 플란넬. 이것도 빈티지라 허리 안쪽 스웨이드 처리가 살짝 갈라지긴 했는데 겉으로 티가 안 나니 그냥 입어요. 핀 스트라이프도 아니고 무지입니다. 기장은 복숭아뼈 위에서 살짝 떨어지게 수선해서 로퍼랑 신었을 때 양말이 지저분하게 접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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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은 블랙 페니 로퍼. 첼시 부츠 신을까 하다가, 바지 기장이 짧아서 로퍼가 더 경쾌할 것 같았어요. 90년대 미국제 플러시하임 빈티진데, 소가죽에 세월 먹은 광이 정말 무심하게 예뻐요. 광택 내지 않고 그냥 솔질만 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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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세서리는 진주 목걸이 하나인데, 할머니가 젊었을 때 하셨다는 마조리카 진주. 보통 진주 하면 우아하고 단정한 느낌인데 이건 알이 고르지 않고 군데군데 얼룩처럼 변색이 있어서 오히려 빈티지 트위드랑 닳고 해진 느낌이 이상하게 잘 어울려요. 지금 신상 마조리카는 이렇게 안 나와요. 그래서 더 아끼는 물건이고요.
가방은... 솔직히 오늘은 안 들었습니다. 잠깐 동네 카페 다녀오는 길이었거든요. 굳이 든다면 낡은 코치의 브리티시 탠 레더 숄더백을 옆구리에 찰랑 매고 다녔을 것 같아요. 로고 따위 플랩 안쪽에 작게 박혀서 아무도 모르는, 그런 가방 말입니다.
이런 날은 괜히 거울을 봐도 기분이 좋아요. 유행을 따르지 않아도, 누가 어디 브랜드인지 몰라도, 그냥 옷 자체의 소재와 세월이 주는 무게감이 저를 안정시켜 주는 느낌이랄까요. 제 또래 친구들은 제 옷 보고 촌스럽다고 하거나 할머니 같다고도 하는데, 저는 그 말이 오히려 칭찬으로 들릴 때가 있어요. 적어도 제가 입은 옷이 '돈 냄새'보다 '시간 냄새'가 난다는 거니까요.
다른 분들은 오늘 뭐 입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요즘 환절기라 어렵긴 한데, 그래도 다들 자기만의 옷 잘 건지시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