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장
장마 끝나고 오랜만에 꺼낸 실크 슬립, 시간이 빚은 광택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해서 빛바랜 셔츠만 주야장천 걸치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 창밖이 유난히 맑길래 오랜만에 옷장 깊숙한 곳에서 실크 슬립 원피스를 꺼냈어요. 90년대 후반쯤 나온 빈티지인데, 보관을 좀 까다롭게 해야 하는 녀석이라 장마철 내내 숨죽이고 있었거든요.
꺼내자마자 손끝에 닿는 감촉이, 정말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매끄럽고 차갑게 감겨오더군요. 요즘 나오는 것들은 가볍고 얇아서 좋긴 한데, 이 녀석은 묵직하게 떨어지는 실크 특유의 무게감이 살아 있어서인지 주름이 덜 가고 광택도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느낌이에요. 색은 샴페인 골드에 가까운데, 딱 봐도 '나 좀 입은 옷이오' 하는 빛바램이 아니라 연식 좋은 가구 같은 기품이랄까.
- 그냥 단독으로 입기엔 노출이 부담스럽고, 또 요즘 과하게 화려한 건 별로라서 속에 얇은 터틀넥 니트를 받쳐 입었습니다. 작년에 우연히 발견한 스코틀랜드산 캐시미어 혼방인데, 목 부분이 살짝 늘어나서 이제야 제대로 길들여진 거예요.
- 겉에는 지금은 사라진 프렌치 브랜드의 린넨 블레이저를 걸쳤는데, 이게 어깨 패드가 거의 없이 떨어져서 슬립의 실루엣을 죽이지 않더라고요. 안감은 찢어져서 수선 맡겼다가, 수선집 아저씨가 "이거 제대로 된 옷인데" 하면서 큐모 까레 실크로 덧대주셨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 사치 부리는 맛이란.
- 신발은 굽이 낮은 메리제인. 이것도 10년 넘은 건데 가죽이 말랑하게 길들어서 발목에 딱 붙어요. 양말은 신지 않았고, 대신 맨발에 바셀린을 살짝 발라서 윤기 나게.
액세서리는 과감하게 뺐어요. 대신 오래된 금통 시계만 하나 찼는데, 광택이 살짝 죽은 금빛이 슬립의 실크와 부딪히지 않고 서로를 감싸주는 느낌이 들더군요. 요즘 옷들은 자꾸만 서로 죽이려고 드는 느낌인데, 올드 피스들은 그냥 서로 자기 자리에서 빛나면서도 공존하는 법을 아는 것 같아요.
사실 슬립 드레스는 '입는다'기보다 '걸친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옷이 몸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 몸의 선을 따라 흘러내려주는 거. 그런데 요즘 나오는 것들은 좀 억지로 몸을 잡아주려고 하거나, 아니면 너무 가벼워서 바람만 불어도 펄럭여서 불안해요. 이 녀석은 20년 넘게 누군가의 체온을 견디면서, 이제는 알아서 제 몸을 따라 흐르는 법을 배운 것 같달까... 뭐 이런 말 하면 좀 오버스럽지만요.
오늘 하루 입고 다니면서,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문득 예전에 봤던 자끄 리베르츠의 사진집 속 여인 같아서 혼자 민망했어요. 그런데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옷이라는 게, 요즘엔 정말 드물잖아요. 오히려 그런 환상을 심어주는 것 자체가 이 옷의 헤리티지고 가치인 것 같아요.
솔직히 요즘 럭셔리 브랜드에서 내놓는 슬립 드레스들은, 그냥 실크 원단에 럭셔리 로고만 박고 기어코 삼켜버린 느낌이라 별로 손이 안 가더라고요. 옷이라는 건 그냥 입고 벗는 게 아니라, 같이 늙어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오늘 같은 날이 참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