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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오늘의 착장

셋업 아닌 스커트 하나로, 계절을 가로지르는 법

빈티지록셔리·1시간 전·조회 46

날이 풀렸다 싶었는데 아직 아침저녁으론 쌀쌀해서, 겨울 옷 정리하기도 애매하고 그런 시기잖아요. 오늘은 옷장 정리하다가 작년 가을에 입었던 A라인 미디 스커트를 꺼내봤는데, 이거 하나로 제법 계절감을 가볍게 가로지를 수 있겠더라고요.

제가 가진 건 90년대 이탈리아 브랜드의 빈티지 캐시미어 혼방 미디스커트인데, 허리선에선 절제되게 잡혀 있다가 밑단으로 내려가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실루엣이에요. 보통 A라인 하면 60년대풍의 과장된 볼륨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건 진동수염이나 밑단 마감만 봐도 아주 정갈하고 차분한 올드머니 스타일의 원피스 수트에서 떼어낸 듯한 형태라서 더 애정이 가요. 원단 자체가 이미 몇 번의 드라이클리닝을 거쳐서 광택이 거의 죽은 상태인데, 빛에 따라 희미하게 떠오르는 텍스처가 요즘 나오는 새틴과는 결이 다르게 느슨하고 우아합니다.

오늘은 여기에 상의로 몸에 붙는 메리노 울 니트를 입었어요. 소매가 살짝 퍼프인데 어깨 라인이 과하지 않은 셔링 니트라서, A라인 밑단의 각도와 니트의 부드러운 볼륨이 얼추 비슷한 톤으로 움직여 줍니다. 허리 밴드가 드러나도록 니트를 탁 밀어넣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걸친 정도인데, 실루엣이 꼭 50년대 영화에서 본 듯한 태가 나더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건 벨트 위치였는데, 보통 A라인 스커트에 허리선이 드러나면 좀 올드해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어요. 저는 체인 디테일이 가느다란 코인 벨트를 살짝 허리에서 1인치 정도 아래로 흘러내리게 착용해서 그 경직된 느낌을 무마했어요. 원래 70년대 페라가모에서 나온 빈티지 벨트인데, 버클에 손때가 곱게 올라서 금속 특유의 번쩍임이 차분히 죽은 상태라, 소재감의 무게를 전혀 깨지 않더군요.

신발은 의외로 플랫 슈즈가 제격이에요. 미디 길이의 A라인은 발목에서 살짝 끝나거나 복숭아뼈 위로 올라오는 플랫을 만나면, 특유의 단정함이 갑자기 생경한 균형미를 띠게 돼요. 차라리 굽이 1센티도 안 되는 키튼힐이나, 아니면 지금 신은 것처럼 발등이 깊게 파인 빈티지 로퍼를 선택하면 다리의 선이 전혀 잘려 보이지 않아요. 여기에 무심하게 검정 양말을 매치했는데, 신발과 양말의 경계가 시각적으로 완전히 연결되니까 발목이 좀 더 유연하고 가늘게 이어져 보였습니다.

A라인 스커트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이자면, 요즘 나오는 원단 중에서는 너무 과한 텐셀이 들어간 코튼이나 뻣뻣한 울 소재보다는 낙낙한 텐셀이나 실크 혼방 쪽이 오히려 성숙한 분위기를 잘 잡아주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는 빈티지 원단을 선호하는 편인데, 예를 들면 80년대쯤 유행했던 약간 드레이프가 지는 경량 울 가버딘이나, 잔털이 일어나면서 은은한 브러시드 텍스처가 느껴지는 캐시미어 혼방이면 A라인의 직선적인 실루엣에 피로감이 덜 쌓여서 참 좋습니다. 최근에 지인 분이 폴로 랄프로렌의 90년대 초반 오피스 라인에서 나온 차콜 컬러의 A라인 스커트를 입은 걸 봤는데, 소재가 아마 울에 모헤어가 미량 섞여서 빛을 약간 머금은 듯한 질감이더군요. 그런 건 아마 제조 연식이 오래될수록 더 부드러워지니까 요즘 백화점에서 보는 거랑은 착용감 차이가 꽤 있었어요.

가끔은, 트렌드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와이드 팬츠의 여유로움 말고 이렇게 정갈하게 떨어지는 A라인 하나가 주는 정돈된 무드가 더 우아하게 느껴질 때가 분명 있어요. 제 옷장 한켠에 거의 7년 넘게 자리 잡은 이 스커트는 매년 꺼내 입을 때마다 다른 옷과 조용히 섞이며 새로운 계절감을 주더군요. 아직 추위가 좀 남아있는 환절기니까, 여러분도 혹시 모셔둔 A라인 하나 있다면 가벼운 니트와 로퍼로 풀어내보셔도 꽤 신선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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