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착장
베스트 하나 바꿨을 뿐인데, 왜 아무도 내적 변화를 눈치 못 채는가
요즘 날씨가 참 애매해서 겉옷을 뭘 걸쳐야 하나 매일 아침 고민이 깊어지더라고요. 그 와중에 옷장 구석에서 실컷 꺼내 입고 있는 게 싱글 버튼 하나 달린 린넨 조끼와 작년 겨울 내내 입었던 그레이 베스트 두 개, 이거 두 개예요. 코트를 꺼내기엔 부담스럽고, 가디건만 걸치면 어디 놀러 나가는 애매한 중간 관리자 같고 말이죠.
저는 베스트라는 카테고리를 진짜 오랫동안 오해했던 사람 중 하나였어요. 2000년대 중반에 유행하던 그, 조끼 안에 긴팔 티셔츠 받쳐 입는 매치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불킥이 나오거든요. 그 시절엔 조끼가 팔뚝을 가리기 위한, 혹은 그냥 뭔가 하나 더 걸쳐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의 산물 같았어요. 그런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3~4년 전쯤부터 레이어드의 개념 자체가 '쌓는 것'에서 '비우는 것'으로 바뀌면서 베스트의 지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껴요. 이제 베스트는 덜어내는 미학에 가까워요. 지금처럼 환절기에는 특히 셔츠나 얇은 니트 위에 슬쩍 걸치는 것만으로도 '이 사람, 좀 아는 옷 입네' 소리 듣는 지름길 같아요. 지난주엔 옅은 하늘색 셔츠 위에 진한 네이비 니트 베스트를 걸치고 와이드한 아이보리 슬랙스를 매치했는데, 보스턴백을 든 건 아닌데 어딘가 모르게 80년대 아이비리그 감성이 나더라고요. 그게 생각보다 되게 우아해서 스스로 좀 놀랐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요즘 꽂힌 베스트의 진짜 무기는 '적당히 헐렁한 실루엣'이에요. 몸에 완전히 딱 붙는 조끼는 아직도 좀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건 진짜 비율 좋고 어깨가 직각인 분들이 아니면 자칫 '식당 홀 서빙복'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어서... 저도 옷정리 하면서 몇 번 실패했어요. 특히 저처럼 상체에 살이 조금 있는 체형은 가슴 둘레가 넉넉하게 떨어지고, 암홀이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걸 골라줘야 그 위에 아우터를 걸쳐도 옆에서 봤을 때 봉긋해지지 않아요. 어깨 끈이 너무 좁은 것도 위험하고요. 지금 입고 있는 네이비 린넨 조끼는 어깨선이 팔뼈 바깥쪽까지 툭- 떨어지는 디자인이라, 이 안에 반팔 티셔츠 하나만 입어도 일부러 남방 셔츠 레이어드 한 것 같은 착시가 생겨서 편해요.
패딩 베스트도 물론 무시 못 하죠. 예전 같으면 '경량 패딩 조끼는 그냥 기능성일 뿐이야' 하고 치부했을 텐데, 요즘은 그 매트하고 과장된 퀼팅 라인 덕분에 오히려 클래식한 트렌치코트 안에 받쳐 입으면 보는 사람이 경악할 만한 조화를 만들어내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베이지색 트렌치 안에 버건디 컬러의 경량 패딩 조끼를 입고, 하의를 데님 대신 같은 톤의 새틴 미디 스커트로 풀어주는 코디를 시도해봤는데, 이건 좀... 저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더라고요. 사진을 못 올리는 게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네요. 그러니까 핵심은, 베스트에 아무거나 받쳐 입지 말라는 거예요. 소재의 대비를 확실하게 봐야 해요. 거친 소재(울, 니트, 패딩)엔 반들거리는 실크나 얇은 코튼 셔츠가 무조건 답이에요. 둘 다 푸석푸석한 재질이면 뭔가 촌스러운 '등산 동호회' 느낌이 갑자기 튀어나올 확률이 90%거든요.
그리고 정말 사람들이 잘 모르는 포인트 하나 말씀드리자면, 베스트를 닫느냐 여느냐는 진짜 신중해야 해요. 진짜 잘 아는 몇몇 에디터 선배님들 보면, 단추를 채우지 않고 그냥 늘어뜨려서 옆선에서 속옷처럼 살짝 허리를 감싸게 만드는 그 연출을 꼭 하시거든요. 그 한 줄기의 바람 빠진 듯한 공간감이 실루엣의 생명이에요. 특히 앞트임이 깊은 V넥 베스트는 그냥 아래로 축 늘어뜨렸을 때의 그 타락한 듯 우아한 선이 매력인데, 괜히 힘줘서 단추 잠그면 그게 그냥 교복 마이의 상의를 벗은 모양새가 돼서 진짜 안타까워요.
아, 맞다. 한 가지 더. 요즘 같은 시즌에 기장이 좀 긴 니트 베스트를 하나 투자하시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기장의 사이드 슬릿이 들어간 베스트는, 그냥 무심하게 입어도 뒤에서 봤을 때 옷이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나요. 저는 여기에 얇은 터틀넥을 받쳐 입고 벨트를 과감하게 베스트 바깥에 둘러 허리를 표시해주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이건 마치 70년대 제인 버킨이 공항에서 입고 나올 법한, 그런 약간의 해이함을 주거든요. 물론 벨트를 바깥에 하면 옷매무새가 자꾸 올라가서 불편할 순 있는데,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핏은 살아나는 매직이 있더라고요. 이건 진짜 추천해요.
오늘 이 코디를 하면서 느낀 건데, 우리가 흔히 '베스트' 하면 정장 삼종 세트의 그 일부를 떠올리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은 좀 접어도 좋을 것 같아요. 차라리 베스트를 하나의 가벼운 아우터로, 혹은 과감한 액세서리로 격상시켜 보시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길게 적어봤습니다. 혹시 다른 분들은 요즘 베스트 어떻게 매치해서 입으시나요? 전 맨날 네이비랑 블랙만 골라 입다 보니, 상큼한 컬러 베스트 도전해보고 싶은데 추천해 주실 만한 색감 있으면 알려주세요. 저는 내일 아마 이 조끼 그대로 입고 출근할 거예요. 아무도 제 옷의 깊은 맛을 몰라줘도 괜찮아요. 제가 알잖아요? 내일도 거울 속에서 셀프 칭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