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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

오늘의 착장

실크 커버트 파자마 셔츠, 바깥바람 들이기엔 조금 아까워서 꺼내 입은 하루.

빈티지록셔리·6.30·조회 34

아, 이거 진짜 집에서 굴러다니던 잠옷 맞냐고 물으실 분들 분명 계실 텐데요. 맞아요, 엄밀히 말하면 90년대쯤 영국 할머니 댁 장롱에서나 나올 법한 실크 커버트 원단 파자마 셔츠입니다. 깃과 소매, 가슴 포켓 테두리에만 살짝 배색 파이핑 들어간 그 클래식한 디자인이죠. 원래는 아래까지 세트로 된 바지가 있었는데, 바지는 제가 잠잘 때 너무 뒤척여서인지 무릎 부분이 닳아서 보내주고 상의만 아직까지 아끼고 있어요. 빛바랜 아이보리 바탕에 네이비 파이핑, 그리고 엄마가 달아주신 듯한 약간 투박한 진주 단추까지… 이걸 어떻게 밖에 입냐고요? 저도 처음엔 그랬어요. 그런데 이 소재, 이 연식의 물건들은 오히려 새것처럼 빳빳한 셔츠보다 훨씬 더 '일부러 흐트러진' 멋을 내기 쉬워요.

그래서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한참을 씨름하다가 꺼낸 조합은 이렇습니다.

  • 파자마 셔츠: 단추는 끝까지 안 잠그고, 가슴 부분까지만 잠가서 안에 입은 이너가 살짝 비치게. 소맷자락은 무조건 두 번 접어서 단의 파이핑이 팔목에서 확 드러나게 했어요.
  • 이너: 파자마의 실크 광택이 너무 단독으로 놀지 않게, 바탕보다 한 톤 어두운 멜란지 그레이의 초극세사 울 터틀넥. 이게 포인트인데, 실크의 매끈한 광택과 극세사 울의 뽀송뽀송한 표면 질감이 부딪히면서 '잠옷 느낌'이 아니라 '소재 믹스를 즐기는 사람'으로 완성시켜 주더군요.
  • 하의: 이게 가장 고민됐어요. 검정 슬랙스는 너무 사무실 같고, 데님은 실크의 무게감을 너무 잡아끌고. 결국 골지가 가늘게 짜인 미드나잇 블루 니트 팬츠를 선택했어요. 바지가 발등 위에서 살짝 떨어지는 쿠션핏이어서, 전체적으로 실루엣이 무너질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파자마 셔츠의 넉넉한 품을 잘 받아주네요. 여기서 신발은 절대 운동화 안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버건디 컬러의 스웨이드 로퍼를 신어서, 복사뼈 주변에 딱 정돈된 마무리감을 줬어요. 로퍼의 스웨이드와 실크가 닿는 그 미묘한 경계가 오늘의 핵심이었달까요.

사실 이렇게 입고 카페에 들어섰을 때, 제 앞 테이블에 앉은 분이 힐끗 셔츠를 보더라고요. 아마 파이핑 디테일이나 진주 단추 같은 요소들이 보통 셔츠랑은 다르다는 걸 느끼신 거겠죠. 결국 옷이라는 게, 브랜드 로고나 액면가 말고 이런 사소한 '연식과 디테일의 힘'으로 말을 거는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집에 돌아가면 이 셔츠 다시 세탁해서 본연의 역할로 돌려놓겠지만요. 오늘 하루만큼은 이 빈티지 실크가 잠옷이 아니라 하나의 '피스'로 바깥 공기를 마시게 해줘야겠다 싶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평소 아끼는 파자마 셔츠나 소재 좋은 홈웨어 있으시면, 한 번쯤 바깥 바람 쐬러 내보내세요. 과하게 꾸미지 않고도, 그 소재가 가진 본연의 헤리티지와 광택이 의외로 멋진 스처 싸움을 이끌어내더이다. 그게 바로 절제된 럭셔리 아니겠어요?

댓글 4

  • 에디터의옷장7.2

    아, 이거 진짜 아까운데... 싶은 마음에 댓글 달아요. 그 무릎 닳은 바지를 보내주셨다는 그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네요 ㅋㅋㅋㅋㅋ 저도 비슷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진짜 속 깊이 공감됩니다. 잠옷이라고 하기엔 원단이 너무 고운데, 막상 겉옷으로 선뜻 꺼내 입자니 그 파이핑 디테일이 은근히 침실 분위기를 못 벗어나서 고민되는 거, 저만 아는 게 아니었군요. 그런데 이런 파자마 셔츠를 진짜 데일리로 끌어올리는 힘은 사실 '상대적으로 덜 다듬어진 듯한' 하의 매칭에 있다고 봐요. 예전에 매거진 에디터 시절에 저희 데스크에서도 자주 얘기 나왔던 건데, 실크커버트처럼 표면에 은은한 광택이 흐르고 촉감이 미끈덕한 소재일수록 밑단이 해지거나 색이 자연스럽게 바랜 데님, 아니면 굵은 린넨 팬츠 같은 로우 텐션 소재랑 부딪혔을 때 진짜 예쁘거든요. 특히 90년대 느낌 물씬 나는 저 배색 파이핑이 디테일로 살아 있으면, 고급스러움과 꾸안꾸 사이의 그 미묘한 경계를 건드리기가 훨씬 수월해져요. 근데 또 막상 바지를 실패(?)하셨다고 하니까... 이 원단 자체가 워낙 매끄럽다 보니 잠잘 때 미끌려서 뒤척이다 보면 무릎이나 엉덩이 부분에 땀 흡수되면서 섬유가 약해지는 경우가 진짜 많아요. 실크라고 다 같은 실크가 아니라 커버트 직조 자체가 능직이라 표면은 강해 보여도 습기에는 은근히 취약하거든요. 저는 그래서 아예 이런 류의 상의는 겉옷으로 입을 땐 이너로 면 소재 슬리브리스나 얇은 티를 받쳐 입고, 팔꿈치나 소매 카프스 부분이 접촉면 마찰로 번들거리지 않게 조심하는 편입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비슷한 원단의 세트를 다시 만나시게 되면... 바지만 미리 풀 먹여서라도 살려보시는 것도 방법일 거예요 ㅋㅋㅋㅋ 어쨌든 오늘 착장 사진은 없지만 글로만 읽어도 톤온톤으로 깔끔하게 뽑으셨을 그림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네요. 이런 클래식 피스 하나 제대로 건져서 입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옷에 진심인 사람이라는 증거 아닐까요.

  • 워크룩그녀7.3

    아 이거... 잠옷인 걸 알면서도 그 파이핑 디테일이 은근슬쩍 오피스룩에 섞일 때 제일 무드 있더라고요. 저런 거 입고 출근하면 아는 사람만 아는 그 빈티지 라운지웨어 느낌 살아서, 오늘 하루 은은하게 기분 좋을 것 같은데요ㅋㅋ

  • 구제수집가7.3

    실크 커버트 자체는 참 곱고 탐나는데, 막상 바깥에 입고 나가면 이게 잠옷인지 셔츠인지 애매한 그 경계가 좀 불편하더라. 차라리 이너로 입고 살짝 보이게 연출하거나, 좀 더 과감하게 아예 와이드 진에 넣어서 90년대 알마니룩 느낌으로 치고 나가야 낫지 않을까 싶다. 아님 말았음ㅋ

  • 민지에오7.3

    아니 잠옷 상의를 이렇게 스타일링할 생각을 하다니 진짜 천재 아니야?? 파이핑 디테일이 은근히 포인트 돼서 오히려 일부러 찾은 빈티지 블라우스 같아 보인다ㅋㅋㅋ 근데 바지 무릎 부분 닳아서 보내준 거 너무 공감된다 나도 잠옷 바지는 왜 항상 하의만 먼저 버리게 되는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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